몇 살 때지?

Raddoc 2011. 8. 27. 12:29

1973년쯤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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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Z vs 태권브이

Raddoc 2011. 8. 27.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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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 태권브이

Raddoc 2011. 8. 27. 12:29

관절가동이 극히 제한적인 장식품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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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충숙왕 17)~1374(공민왕 23)
고려 제31대 왕(1351~74 재위)
 
 
개요
공민왕릉, 개성 개풍군 해선리 ...

 

 
처음 이름은 기(祺)이고, 뒤에 전(顓)으로 고쳤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고, 아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다.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개혁정치
공민왕의 영토수복과 북방개척

 

 
공민왕은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다음해 1월에 몽고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암시했다. 곧이어 2월에는 권신(權臣)이 변칙적으로 인사행정을 하여 더 큰 폐단을 낳던 정방(政房)을 혁파하여 정치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아울러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여기에서 공민왕은 역대 선왕 및 기자(箕子)에 대한 봉사(奉祀)를 언급하여 그의 자주의식의 일면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정치면에서 왕의 권능을 직접 발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제면에서는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에 대한 시정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전민변정사업). 얼마 뒤 8월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는 부원배(附元輩)를 중심으로 하는 권문세족의 반발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즉위한 지 1년 만인 9월에 조일신의 난이 발생하여 공민왕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대신 부원세력이 강화되어 더이상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356년(공민왕 5)에 이르러 마침내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원의 세력이 약화되는 대륙의 정세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전격적으로 주살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압록강 이서와 쌍성(雙城)지역을 공격했다. 뒤이어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원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官制)도 문종 때의 것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24항목에 걸치는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공민왕 즉위 초의 전민변정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 시도와 그 맥락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홍언박을 정점으로 하는 왕의 외척세력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재위 8년과 10년에는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따라서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이 개혁도 전반적인 면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공민왕 14년부터 또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먼저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신설하여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都堂)의 권리를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던 외방의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이전에도 설치된 바 있는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두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전민을 변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권문세족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여 신돈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정치적인 제휴가 이뤄졌다.
신돈이 등장한 이후 공민왕과 신돈, 신진사대부가 추진하였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시도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되자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공민왕대 마지막 개혁 시도였던 신돈의 개혁도 중도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반원정책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1년은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으로,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도 이때를 전후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위(帝位)를 둘러싼 분쟁과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순제의 실정(失政)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진 틈을 타 각지에서 한인(漢人) 반란군이 봉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원은 토벌군을 파견하여 그 진압에 힘썼는데, 고려에도 군대파견을 강력히 요청했다. 일찍이 공민왕은 왕자로서 원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원의 쇠약상을 목격한 바 있으며, 즉위하여서는 곧 반원 의지를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을 굳히지 못한 공민왕은 부득이 원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1354년(공민왕 3)에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했다.
고려 조정군은 다음해에 귀국했는데, 고려는 이 기회에 원이 동요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큰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드디어 적극적인 반원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기철 등의 부원배(附元輩)를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관제를 문종 때 것으로 복구했다. 그리고 평리(評理) 인당(印璫)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략케 하여 파사부 등 3참을 깨뜨리고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雙城) 지역을 쳐서 회수하는 등 여러 조처를 단행했다. 아울러 중국 대륙의 정세변동을 빨리 파악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이나 방국진(方國珍) 등의 군웅과 자주 교빙했다.
이에 대해 원은 크게 반발했다. 비록 원은 전보다는 약해졌으나 공민왕으로서는 아직 원과 정면으로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가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서북면을 공략했던 인당을 베어 사과한 것 등은 부득이한 조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원의 압력을 받아 동요하고 있을 때인 공민왕 8년과 10년, 북방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원은 이를 수수방관하여 다시금 국력의 쇠약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거기에다가 1363년(공민왕 12)에 원 세력과 결탁한 김용의 반란, 1364년 원이 직접 개입한 덕흥군 옹립 사건 등이 일어나 고려와 원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그러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원이 북쪽으로 쫓겨가자, 고려는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명과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맺었다. 아울러 공민왕은 익군(翼軍)을 조직하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지용수를 서북면원수로 삼아 압록강 북쪽의 만주지역에 있던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했고, 랴오둥의 중심지인 랴오양을 공격하여 그 성을 빼앗았다. 이후에도 공민왕은 반원친명정책(反元親明政策)을 계속했으나, 이후 고려말의 복잡한 국내외 정세는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을 가져왔다.
 
 
시역사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 1371년에는 실정을 거듭하는 신돈마저 귀양보내 사사(賜死)했다. 공민왕은 1372년에 공신 및 고위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했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윤(洪倫)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익비가 임신했다. 이를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고하자, 평소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홍윤 일파와 최만생을 모두 죽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만생이 먼저 홍윤·권진·홍관·한안·최선 등과 공모해 밤에 공민왕을 죽였다. 뒤에 이들은 이인임·안사기·경복흥 등에게 발각되어 효수(梟首)당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 큰 글자에 뛰어났다. 작품은 〈천산대렵도 千山大獵圖〉만이 전하는데, 이밖에 〈노국대장공주진 魯國大長公主眞〉·〈아방궁도 阿房宮圖〉·〈현릉산수도 玄陵山水圖〉·〈석가출산상 釋迦出山像〉·〈동자보현육아백상도 童子普賢六牙白象圖〉등이 훌륭하다고 전해진다. 시호(諡號)는 공민(恭愍)이며, 능은 현릉(玄陵)이다.
 
安秉佑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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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결에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고민도 해보았습니다만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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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 2시, 봉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2시 40분 경 진영운동장 맞은 편 도로변을 차를 주차하고 운동장으로 걸어갔습니다.

진영운동장 주차장은 벌써부터 만원이었고 셔틀 버스를 타기 위해 서있는 줄은 엄청 났습니다.

약 15분 정도를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봉하마을에 도착하니 3시 20분 경, 봉하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20분 정도 긴 행렬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 삼삼오오 모여 가고 있는 여고생들, 검은 정장을 한 중년신사 등등 많은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다양한 단체의 현수막들이 전 대통령을 애도하고 있었고, 길을 따라 끝없이 만장들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마을회관의 임시 분향소 입니다. 빈소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침 노스님께서 노무현 대통령께 헌시를 하고 계셨습니다. 조문은 약 50여명씩 헌화, 묵념, 상주와 맞절 순으로 간단히 진행되었습니다. 생전에 외롭지 않게 했어야 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뵙게 되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자원 봉사자분들이 국화를 한송이씩 나눠 줍니다. 제가 영전에 올린 국화입니다.

 

부엉이 바위 입니다. 아래를, 또 맞은 편 뱀산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냥 바위 위에 우뚝 서있으셔도 될 듯한데..

 

절절한 마음이 담긴 글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돌아가는 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러 가고 있습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가려고 하다가 그냥 걸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 들르셨던 세영병원이 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봉화마을에서 진영운동장까지 1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바보 노무현, 바보 노무현을 진심으로 조문하러 오는 모든 사람들이 바보였고, 노무현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고, 따뜻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너무나 차분하고, 정숙했습니다.

아무도 남 탓하지 않았고, 얼굴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노무현들이 가신 분의 빈자리를 채우고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가시는 곳 그저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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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아침..

Raddoc 2011. 8. 27. 12:28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대한민국이 그를 죽였습니다.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도 그를 죽였지만 저도 그를 죽였습니다.

더러운 정치판에서 지나친 순수함으로 승부한 그는 가족과 동지들이 정권에 의해 발이 묶인 외로운 상황에서 죽음으로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를 외롭게 했다면 저도 그를 죽인 것과 다름없습니다.

 

국민을 죽이고도, 수천억원을 갈취하고서도 당당하게 사는 놈도 있는데 스스로를 죽이셨습니다.

 

천하고 비루한 정권의 압박에 이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순수함이 그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주변의 비리(?)는 그의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용한 것이지 그의 순수함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부디 순수함이 짐이 되지 않는 편안한 세상으로 가셨기를 기원합니다.

 

아마 제 남은 평생, 당신 같은 대통령은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Rad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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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편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에게는 큰 절을 두번 하는 날입니다.
한 번은 저를 낳고 길러 주신 저의 부모님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또 한번은 저를 대통령으로 낳고 길러 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저는 경남 김해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자 석자를 쓰시는 아버지와
성산이씨셨던 어머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저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을 물려주셨지만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도
함께 물려 주신 아버지셨습니다.
매사에 호랑이 같았던 분이지만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도 함께 가르쳐 주신 어머니셨습니다.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슬픈 사람,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쁜 사람,'
오늘 그 두 분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국회의원의 어버이도 국민입니다.
한 인간을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개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나온다'라고 명시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여러분의 관심 하나에 이 나라 정치인이 바뀌고
여러분의 결심 하나에 이 나라의 정치는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심과 결심 또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낳아 놓고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잘 하면 칭찬과 격력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 냅니다.
농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선량한 곡식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사리사욕과 잘못된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는 일부 정치인.
개혁하라는 국민 대다수의 뜻은 무시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나라의 앞날을 막으려 하는 일부 정치인.
나라야 찢어지든 말든 지역감정으로 득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
전쟁이야 나든 말든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정치인.

이렇게 국민을 바보로 알고 어린애로 아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국민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어떤 저항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의무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헌법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실 일은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고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도 어버이의 회초리를 드십시오.
국민여러분의 회초리는 언제든지 기꺼이 맞겠습니다.
아무리 힘없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그것이 국익의 회초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맞고 온 힘을 다해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 있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드는 회초리라면
매를 든 그 또한 국민이기에 맞지 않을 방법은 없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너 내 편이 안되면 맞는다'라는 뜻의 회초리라면
아무리 아파도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큰 뜻을 위배하라는 회초리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기댈 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런데 하나 경계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비판자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없이 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익집단은 있지만 집단이기주의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대한민국.
좀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돕는 대한민국.
동(東)에 살고 서(西)에 사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대한민국.
바로 화합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대 차이는 있지만 세대 갈등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식은 부모세대가 민주주의를 유보하며 외쳤던
'잘 살아 보세'를 존중하고
부모는 내 아이가 주장하는 '개혁과 사회정의'를 시대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자식은 부모에게서 경험을 배우고 부모는 자식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배우는 대한민국.
자식은 밝게 자라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부모는 자식의 밝은 생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대한민국.
바로 사랑으로 행복한 대한민국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높은 자리, 많은 돈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
사랑하는 아이를 한 번 더 안아 주지 못한 것,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답니다.
저도 IMF 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전국의 노동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저의 이 편지가 부모님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
대한민국이라는 가족공동체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효도 많이 하십시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마음으로 빨간 카네이션을 바치며...

2003년 5월 8일

대한민국 새대통령 노무현
Posted by Rad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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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이 나올 때까지..

Raddoc 2011. 8. 27. 12:28

더 이상 사지 않을 겁니다.

딸래미들이 좋아한다는 핑계로 너무 많이 사버렸네요.

자주 변신 시키다보니 이제는 설명서가 필요 없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Posted by Rad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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